걸은 날: 2011. 9. 10 (토)
교통수단: 서귀포 구터미널에서 제주행 버스 타고 중문 우체국에서 하차-> 서귀포발 서일주 제주행 버스로 환승-> 화순리(화순항)에서 하차
바다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10코스 올레길 시작->모슬포항에서 10코스 끝
추사 김정희 유배지-- 모슬포에서 택시로 10여분 소요 (택시비 5000원)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은 타고난 천품과 치열한 학예연찬으로 서예사에서 뿐만 아니라 금석 고증학, 경학, 불고,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제주 대정읍은 김정희 선생이 55세가 되던 해에 윤상도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약 9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2007년 10월 국가사적 으로 지정되었다.
추사 선생은 이 곳에 8년 3개월 머물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법고 창신'하여 '추사체'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려내었다.
제주 추사관은 추사기념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부국문화재단, 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해주신 '예산김정희종가유물', 추사 현판글씨, 추사 편지글시, 추사 지인의 편지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세한도 歲寒圖 > 국보 제 180호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중일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1803-1856)이 책을 보내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그려준 그림이다. 이 작품은 예서체로 쓴 '세한도'라는 표제와 소나무, 잣나무, 가옥 등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화면 그리고 김정희의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메마르고 거친 필치로 표현된 화면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황량한 분위기는 발문에 쓰여 있는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서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구절과 잘 부합된다. 제주 추사관의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추사연구자였던 후지스카 치카시(1879-1948)가 1939년 복제하여 만든 한정본 100점 가운데 한 점이다.
10코스 출발 지점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방산 한라산 정상(백록담)의 돌을 던져 만들어 졌다는 전설이 있다.
화순 해수욕장
바닷물에 의해 침식된 바위가 장관을 이루다.
아들아 가슴을 활짝 펴고 훨훨 날아라.
효종 4년(1653년) 하멜 일행이 탄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르웨르(SPRWER)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은 채 제주도에 표류하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2년간 억류되다 전라도로 이송되어 1666년 탈출에 성공한 하멜 등 8명은 네덜란드에 귀국하였다. 하멜은 1668년'하멜표류기'를 써서 유렵에 조선을 널리 소개했다.
말을 타고 한 바퀴 도는데 5000원, 말 타는 곳이 두 곳인데 한쪽은 계속 사람이 대기 한쪽은 텅 비어 있다. 아들은 텅 빈 곳이 안쓰럽다고 내가 타 줘야겠다고 한다. 어릴 땐 전철에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돕겠다고 하더니 인정이 많은 아들이다.
침식에 의해 형선된 기이한 해안
송악산진지동굴 - 일본군은 송악산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해양특공기지를 만들어 포대 및 토치카, 벙커 등을설치했다. 송악산 알오름 쪽의 땅굴은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크고 넓게 건설되었고 다른 지역에서 파 들어간 땅굴이 거미줄처럼 이어지게 만들었다는데 저 밑에 까지 내려가 보지 못했다.
알뜨랑비행장을 향해 가는 10코스 길 가면서 보니 화살표 마다 지운 자국이 있어 의문이 갔었다.
다음날 11코스 시작점 올레지기님께서 지운 화살표는 옛코스 였는데 새로운 길로 다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럼 그렇지......
10코스는 걷는 동안 계속 산방산이 보인다.
추사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사선으로 비스듬한 부분과 복합으로 설계함이 독특했다.
추사관 해설사님을 아침에 버스에서 부터 만나는 인연이 되어 특별히 대정마을까지 돌아 보시며 안내를 해 주셨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만남의 인연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제주도 정통 올레이고 가운데 돌은 비가 올 떄 건너는 디딤돌이다.